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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걸음을 디디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다 

“이거야 나원 참… 어디 목사노릇 해 먹겠나?” 
박원재 목사는 손을 씻으면서 계속 투덜거렸다. 방금 전 교회 로고안을 놓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나온 터였다. 
이웃 초청 행사를 준비하면서 교회 로고를 제작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몇 몇 장로님들을 중심으로 교회 로고를 만드는 중요한 일인데, 평신도 사역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근 5-6년째, 뭔가 새로운 시도들을 할 때마다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시던 분들이 이번에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비전 위원회라는 모임으로 명명이 되면서 젊은 집사들도 몇 명 참여하게 되어 위원들의 고른 배열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간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변 교수님 연구팀에서 30여개가 넘는 디자인 시안들을 만들어 오고, 그 중 2-3개를 최종안으로 확정하도록 권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장로님 한 분께서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연구팀에서 강력 추천한 디자인을 젊은 층에서도 매우 선호하고,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당신들이 보기에는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한 번 추진해 보자고 의견이 좁혀지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결국은 사람들의 일 

“하하하. 박목사, 너무 실망하지 말게. 많은 경우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추천해 주신 그 로고안이 참 마음에 드는데요, 다음 주로 다시 연기가 되어 너무 죄송합니다.” 
손을 씻고 따라 나오신 교수님께서 근처 카페에서 차를 한 잔 하자고 하셨다. 교회가 도심과 약간 떨어져 있다 보니 토요일 오후라 한가한 편이었다. 변 교수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런 일은 로고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네. 한 단체나 기관의 얼굴을 새로 만드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수많은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관점, 미학적인 관점, 미래에 대한 기대가 틀린 부분들을 어떻게 하나로 취합할 수 있겠나?  때문에, 컨설팅을 할 때 미리 언질을 드리는 부분도 있다네. 단체의 로고를 만들 때 아주 민주적인 절차를 걸치겠다 하여, 여러 개의 프리젠테이션 안 중 투표로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네.  일부러 하나의 로고만 깔끔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허접하게 만든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방향성이 틀린 2-3개의 로고(예를 들어 하나는 젊은 층을 강조, 다른 하나는 전통을 강조)를 배치한다면 표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네. 그래서, 이런 일을 할 때는 목회 스탭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이는 소규모 의사결정 그룹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 사실 그레이스 힐 교회의 위원회 구성은 좋은 예라고 할 수도 있지. 더구나, 젊은 사람들부터 장년과 목회 스텝이 고루 섞여 있다는 점이 매우 맘에 들었다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때 변교수님은 이야기를 이으면서 의외의 제안을 하나 꺼내셨다. 
“프리젠테이션에서 반대의견이 나온다면, 그것에 대해서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네. 때로는 반대의 목소리가 진실일 수도 있으니 말야. 그것이 정말 로고에 대해서 본질적인 질문일지, 아니면 그저 의사결정 과정에서 딴지를 거는 것인지 말야.  우리 쪽에서는 앞으로 그레이스 힐 교회의 비전과 지금 제안하는 로고가 매우 잘 조화가 된다고 판단이 되고, 다른 지도자 분들의 의견도 일맥 상통하는 것 같으이…. 아마도 아까 그 장로님은 교회의 느낌이 확 변화되는 것이 싫으신 것 같네.  이건 내 의견인데 말야, 박 목사와 담임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한 번 설득해 보게. 그리고, 반대하신 진짜 이유를 차근차근 여쭤보게나. 쉽게 말씀을 안해주실지도 모르네. 하지만 박목사! 그 분의 참 목소리와 근심을 꼭 들어야 하네. 이번 주의 숙제는 이것일세.  그럼 나는 로고가 확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 스텝을 밟아 나갈까 하네.”



원로들의 목소리를 듣다

로고를 반대하셨던 원로 장로님께서 하신 얘기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장로님은 로고 자체가 싫은 게 아니셨다. 보기에 적당히 예쁜 감도 있었고, 뭔가 확 바뀌게 된다면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도 같다는 생각도 하셨다. 그러나, 다른 장로님들과 함께 이러다 교회에서 자신들의 지혜가 그대로 사장되고 말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는 이야기셨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2-3년 사이 박목사가 원로 장로님들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한 번 목소리를 내셔야 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박목사, 이 교회는 우리들이 세운 것이나 마찬가질세. 물론 이것이 한편으로는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아네. 하나님의 교회를 어찌 사람이 세우겠나. 하지만, 또한 이곳에는 우리 늙은이들의 시간과, 돈, 헌신과 기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네. 이걸 죽을 때 무덤으로 가지고 갈 생각은 없어. 하지만, 우리도 아직은 살아서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네. 그냥 허수아비가 아니란 말일세.” 
변 교수님은 벌써 이런 상황을 아신걸까? 장로님들과의 모임이 잘 타결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리기도 전에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메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의학의 발전과 인구증가로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노인세대가 크게 증가할 것이다. 벌써 노인복지문제가 노인인력의 활용방안을 위한 체계적인 연구와 노력들이 진행중이다. 교회에서도 당연히 장년층의 요구와 이해에 대해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박원재 목사는 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시니어 봉사 부서를 만들고, 그 분들이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을 드림과 동시에, 실제 교회를 위해 몸을 움직여 헌신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로 담임목사님, 장로님들과 상의했다. 다행스럽게도 장로님들께서도 원탁에 앉아서 가부만 결정하는 비대한 의사결정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모델을 다시 세워볼 것을 말씀하셨다. 



변화의 작은 바람이 불다

기적이 어느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동안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늘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장로님들께서 직접 몸을 움직이는 뭔가를 하시겠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놀라웠다. 박 목사는 매우 놀랐고, 곧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교회 원로들을 원망하며 부흥의 걸림돌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 로고에 대한 사용방법이 담긴 매뉴얼이 도착했다. 
오렌지색의 교회 로고는 ‘밝은 언덕 위에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집과 같은 교회’라는 컨셉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정이 되었다. 오렌지 색은 열정과 보혈, 따뜻함 들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교회는 변 교수 팀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의 집중사역목표를 정하였다. 변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비전 선언문은 아니라고 한다. 비전 선언문을 하루 이틀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은 로고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그동안 교회가 중시했던 것과 앞으로 나아갈 바를 조금 더 선언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로고와의 통일성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레이스 힐 교회는‘지역 한인들의 삶을 치유하는 밝은 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그동안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통해 한인들을 지원하고, 가난하거나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의 선언은 그 성격이 다르다. 앞으로 모든 교회 활동은 이 선언문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춰질 것이며, 또한 이런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더 많은 프로그램들을 고민하기로 했다. 
그레이스 힐 교회는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외국인보다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신자, 불신자를 포함하는 한인들. 그리고 어린아이와 어른, 노인들의 삶의 전인적인 치유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치유라는 단어가 조금 유행에 뒤떨어진 감도 있었으나, 이민이나 유학, 외국 생활에 지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당분간은 그 단어의 의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을 넘어 ‘밝은 교회’가 될 것을 약속했다. 앞으로의 교회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참된 밝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과 2차 비전위원회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오는 박원재 목사의 귓가에 시원한 가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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